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니 아파트 현관 문 손잡이는 부러지고 문은 찌그러진 체 열려 있으며 집안의 장롱은 다 뒤져서 온통 방안이 난장판이 되어있어 무서워 죽겠다고 말도 더듬는다. 내가 뭐 잃어버린 건 없냐고 물었더니, 사람 상한 것 보다 뭐 잃어버린 게 더 중요하냐며 괜히 나한테 화풀이를 했다.
아파트 관리실에선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이 와서 조사를 했다. 우선 현관과, 엘리베이터의 CCTV 녹화 장면을 보니 아침에 모든 식구들이 다 출근하고 얼마 안 되어서 건장한 두 남자가 모자를 깊이 눌러 쓴 체 마침 복도 청소하는 아줌마가 움직여서 자동 현관문이 열리자 그냥 들어오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경찰은 우리 집안의 출퇴근 행태를 아는 자들의 소행이라 했다. 경찰관은 도둑맞은 물건들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방안이 어지럽고 혼잡하여 지금은 모르니 나중에 알려 주겠다고 대답하고, 학교에 나가있는 두 딸들을 급히 돌아오라 했다.
집안을 정리하며 식구들 서로가 물어보았다. 혹시 현찰이나, 수표나 외화나 서로 간에 모르게 숨겨 놓았던 게 있었냐니까 그런 건 결코 없단다. 그럼 무슨 패물이나 보석 같은 귀중품이 있었던가를 서로 확인해 보았다가 그딴 걸 언제 사주어 본적이라도 있었느냐고 망신만 당했다.
장롱을 다 정리할 무렵 하나 잃어버린 것을 겨우 찾아냈다. 내가 치과대학 학장 재직 후 기념으로 받았던 황금 열쇠 하나였다. 우리 집 장식장에 있던 유일한 금붙이였는데…. 딸애는 신나서 그 경찰 아저씨에게 전화해서 잃어버린 행운의 열쇠가 있다고 신고 했다.
두 명의 도둑들은 장롱 속을 파헤치다가 장롱 깊숙이 보자기에 싸인 것을 발견했나본데, 그 속엔 나랑 집사람이 결혼 전 연애 시절부터 주고받았던 편지, 사진 ,선물 등을 집사람이 꼭꼭 싸서 숨겨 두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그걸 무슨 보물단지라도 되는 줄 알고 뒤지고 읽고 즐겼던 흔적이 확연했다.
두 딸들은 방안을 정리하다가 이게 무엇인지 처음 발견하고는 둘이서 번갈아가며 자세히 읽고는 깔깔대며 웃어댔다. 참으로 유치했던 부모의 과거 행동들이 그 도둑들 때문에 딸들에게 적나라하게 까발려지고 만 셈이다.
하기야 그 도둑들 아니었으면 앞으로도 한참동안 장롱 구석에 싸여 있다가 언젠가는 그냥 쓰레기 통으로 들어갔을지도 모르는 물건들이었다. 딸들은 그냥 재미있어하며 우리 부부 칠순 때 이걸로 책자를 만들어 주겠다며 놀려댄다. 금 열쇠 외에는 잃어버릴 것도 없었고 잃어버린 것도 없었다. 돈 모으지 못하고 매달 받는 월급을 그달에 다 쓰기에도 늘 모자란 봉급자가 이럴 땐 참 편안하다.
수년 전에도 필자가 근무하던 치과대 교수 연구동에 좀도둑이 든 적이 있었는데, 몇 분 교수님들의 방이 줄줄이 털렸었지만, 평소에 늘 문을 잘 열어놓고 다니고 방안이 항상 어지럽고 지저분한 내 방은 시근장치가 매우 허술했음에도 불구하고 털어가지 않았다.
아마도 주위 사정을 잘 아는 도둑이어서, 이방엔 털어 갈만한 가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거나, 너무 더럽고 어지러워, 실내를 정리해가면서 털어가기가 힘들다고 여겼는지, 아니면 진짜로 털리고도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도 내가 모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부서지고 찌그러진 현관 문짝을 임시방편으로 대충 펴서 닫을 수 있게 고치고 나니 또다시 도둑이 쉽게 들것이 걱정이다.
식구들과 의논을 했는데 막내딸이 아이디어를 냈다. 닭갈비와 막국수가 유명한 어느 도시에 가면 식당마다 ‘KBS에 나온 집’ ‘ MBC에서 방영된 집’ 'SBS에서 소개 된 집’ 등 간판이 붙어 있는데 어느 한 식당엔 솔직 대담하게 ‘KBS MBC SBS에 단 한 번도 안 나온 집’ 이라고 써 붙여 놓았더니 오히려 손님이 더 많은걸 보았다며 우리도 다음 도둑에게 우리 집 사정을 솔직히 공개하고 알려 주자고 했다.
그래서 아파트 현관문 밖에 ‘며칠 전 다 털린 집’ 이라고 써 붙였다. 이걸 보고 도둑들이 더 이상 들어 올 필요가 없는 집으로 생각했음 좋겠다.
때마침 TV 뉴스에는 이 세상에 무소유의 철학을 설법하신 법정스님의 입적 소식과 무소유를 논한 책이 절판되자 이를 소유하고자하는 인간들의 소유욕에 대해 방영하고 있었다.